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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라이프

영혼이란 이름의 생명

by 켄 루미나 2023.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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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일단 인간에 대해 살피겠습니다.
인간에게는 3대 기본 욕구가 있습니다.

식욕, 성욕, 수면욕


이 세 가지의 욕구는 만족할 줄 모르며, 이 세 가지를 기반으로 사람의 활동 영역은 넓어집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에 대한 것이 충족되어야지. 인간은 그다음의 것들을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의식주를 생각할 것이고,
자신의 것이 채워지면, 타인을 돌아볼 수 있을 것이고,

꿈과 이상이라는 것이 생깁니다. 목표 같은 것들요.



요한복음 4장에서 우물가의 여인과의 에피소드 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이 기분이 배부른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미쳤습니다.
전에는 잘 이런 감각을 느껴본 적이 없었나 봅니다.
우리가 교제한다고 하던 많은 것들이. 그저 우리들끼리의 잔치 자리가 대부분이어서 그랬는지.
그냥 형제자매가 함께해서 좋고 그런 것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집회 같은 건 잘 안 하다 보니, 이런 걸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나 보죠.

그저 절묘합니다.
왜 하필이면, 양식이라고 하셨을까요?

영광이 있느니라.

자랑이 있느니라.

같은 것들이 아니고요.

말씀드렸다시피,

 
먹는 일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결국은 배가 다시 고픕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양식을 갈구해야 합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기도 하고,

칼을 들고 산으로 사냥을 나가기도 합니다.

아니면, 돈으로 사서 먹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다음 양식을 위해 함께 모여 모의하고 궁리해야 합니다.

절묘합니다.

 이 생각이 미쳤을 때, 저는 또다시 떠오른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 6:9~13
 

바보 같지요.

 저 양식을 그저 육신의 밥 정도로 생각했다니요.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며, 식탁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니요.

 정말 우리에게 저런 기도가 필요하니 저런 기도를 하라고 하셨다는 생각이 곱절 듭니다.
우리의 영혼도 거듭났다면
응당 영혼도 살아있고 생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과 같은 일들이 우리에겐 양식으로, 우리 영혼의 배를 채워주는 식욕을 만족하는 모습도 있지만
 복음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령이 교회를 모체로 하여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성욕을 만족하는 모습도 갖추고 있습니다.

 즉, 우리 영혼에 있어 전한다는 부분은, 먹는 것과 같은 배를 채워 든든하고, 만족하게 하는 형태를 취하는 것과 동시에, 성교에서 얻는 환희와도 같은 쾌락을 우리의 영혼에 부여하는 구조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면욕?

그건 사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크크크

 잠이라는 것은 어쨌든 인간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기하지요. 잠이라는 것으로도 인간은 힘을 다시 얻을 수 있다니,

그 구조와 신비를 파헤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잘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잠이 죽음의 그림자와 같은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것 정도이군요.

인간은 피할 수 없고,

부활할 수 있죠.

 어쩌면, 힘을 충전한다는 부분은, 우리가 말씀을 전한다는 부분과도 맞물릴 수도 있겠군요. 힘써 전하지만, 되려 다음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요. (제가 땔감을 보탰다는 말처럼요. 하하)

하여튼 이 부분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하

 
대충 정리!!

 

영혼에도 3대 욕구가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영혼도 일반 생명의 구조와 같다면,

 아직 미숙한 영혼들이, 저 하늘에서 받을 상급과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해 꿈꾸며, 힘을 얻을 수 없는 것도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아직은 자신도 먹을 줄조차도 모르는 영혼들이 아직도 많은 현실이며 사람과 같은 맥락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역시 먹고 사는 문제에만 얽매이겠죠.

 

요즘은 도리어 사람 사는 것이 너무 먹고 사는 것만 하는데에도 급급하다는 것이 문제인거 같아요. 꿈을 꿀 수 없고 미래를 그릴 수가 없고 희망이 없으니 자손이라는 생명을 이을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육신과 정신은 하루하루 살 마음을 잃어버리며 평시적인 생존도 포기를 하지만

통시적 생존 또한 포기를 하게 되는 군요.

혹은 영양실조에 걸려(이른바 풍요 속의 빈곤이죠.ㅋ) 살아갈 힘조차 잃어, 그냥 세상의 바람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삶을 정도 밖에 못 살겠죠.

사실 우리는 아직 그렇게 전한다는 부분에서 많은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군으로 나서는 사람이 적습니다.

일하면 삯을 얻을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힘을 얻을 수 있는데...

 -다른 교제 하면 되겠지, 모임 열심히 나가면 되겠지.-

네, 그것도 좋습니다. 정말 좋습니다.

근데 그것만 하셔서, 기쁠까요?

'내 인생은 행복과 희락 속에만 있다고 말 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과 베드로 뭇 많은 제자의 행적이

고행길로 보이시나요?

 

저는 인간적으로 힘든 일을 만날 때마다 언젠가 들었던 박신양 배우님의 일화가 생각이 납니다.

 

“러시아 유학 당시 교수님께 물었어요. ‘선생님, 전 왜 이렇게 힘든가요?’ 선생님이 답대신 철학자가 쓴 시집 한 권을 주시면서 공부해오라고 하셨어요. 그 러시아 시의 내용인즉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말이었어요. 전 깜짝 놀랐어요. 지금까지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우리의 인생은 늘 행복하고 힘들지 않아야 된다는 생각이 언제부턴가 있었죠. 힘들면 우리 인생이 아닌가요? 그런데 생각해봤어요. 힘들 때와 힘들지 않을 때가 얼마만큼씩 있지? 생각해보면 즐거울 때보다 힘들 때가 좀 더 많은 게 인생인 것 같아요. 그렇다면 그 힘든 시간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나의 인생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요.” 

 

믿음이 없는, 영생의 희망이 없는 사람 마저도 열심히 살아가시며 힘든 순간도 꿋꿋이 살아나가시는데, 영혼의 영원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라는 든든한 도피처가 있어서 도리어 더 나약한 것 같습니다.

괜히 신 앞에서 응석을 부리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더러더러 해 봅니다.

 

그로 인해 부끄럽다고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길을 평탄하게 준비해 주지 않았다며, 불평하며 누워 있어야 할까요? 힘든 길이라고 바라보는 시각 자체도 다분히 인간 기준의 시각이지요. 당금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 마저도 너무나도 시각이 인본주의적입니다.

 

앞선 성도들분들.. 그 들이 정말 고행길로서 그 길을 갔을까요? 세상에서 핍박이라고 명명했다고 해서 핍박으로 여기며 그 삶을 살았을까요.
  

그들이야말로 누구보다 열심히 먹어대고,

열심히 즐긴(?) 사람들입니다.

 육신이 아니라 그 영혼들이 말입니다. 

 

새로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가면서 느끼는 기쁨을 마음껏 먹었을 겁니다.

 



그들의 나날은 실로

'날로 더욱 더 귀하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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